기억을 재생하는 기록
최종 수정일: 2020년 1월 7일

다큐멘터리 <시바티에서의 마지막 나날들(Last Days in Shibati, 2018)> 리뷰
김진수 홍보와기획위원회 운영위원
2016년, 박김형준 작가님의 사진전이 열렸다. 마스크와 안전모를 쓴 남자들. 펜스. 크레인. 길바닥에 엎드린 구본장 여관 이길자 사장님. 하늘. 꽃. 노래. 그리고 우리. 3년 전의 옥바라지 골목이 사진에 박혀 있었다. 나는 그 기록 앞에서 억울했고, 분노했고, 웃었고, 울었다. 신기한 일이다. 기록은 마주한 사람을 붙잡고 때와 장소를 단숨에 건너뛴다. 그리고 그때의 기억과 감정을 지금 여기 펼쳐놓는다.
<시바티에서의 마지막 나날들(Last Days in Shibati, 2018)>은 중국의 ‘시바티’라는 작은 동네가 재개발로 인해 사라져가는 과정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엄청난 속도로 발전한 중국 충칭시의 중심엔 마천루가 빼곡하다. 그리고 바로 옆, 최첨단의 빛이 닿지 않는 곳에 ‘시바티’가 있었다. 프랑스의 다큐멘터리 감독 헨드릭 뒤졸리에(Hendrick Dusollier)는 세 차례의 방문을 통해 시바티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카메라에 담긴 시바티는 그림자였다. 불야성을 이루는 일월광광장(日月光廣場)의 그림자, 2019년의 중국이 만든 그림자였다. 감독은 그 속에서 살아가던 이들의 얼굴과 뒷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초강대국’ 중국의 국민이라는 자부심, 동시에 평생 살던 땅을 떠나야 하는 근심, 낯선 곳에서 살아갈 날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들의 표정과 걸음걸이에 묻어난다. 카메라는 그들의 뒤를 따라 시바티에서부터 새로 조성된 주거단지까지 따라간다.
시바티 골목의 마지막 이발소를 운영하는 ‘리’. 손님의 머리를 능숙하게 다듬으면서도 카메라를 향해 웃음을 잃지 않는 베테랑 이발사다. 재개발 계획이 통보된 후, 그는 갖은 방법을 동원해 이발소를 지켰지만 결국 당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담담히 말한다. 시바티가 사라지고 나서 그는 나라에서 정해준 장소에서 다시 이발소를 시작하지만 단골들은 모두 사라졌다. 낯선 곳에서 다시 가위를 든 그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가판대에서 수박을 파는 8세 소년 ‘홍’과 가족들은 새로운 주거단지에 집을 배정받았다. 홍은 익숙한 시바티를 떠나고 싶지 않다. 도시의 화려한 불빛도, 앞으로 살게 될 아파트도 낯설기만 하다. 처음 타본 지하철에서 처음 마셔본 코카콜라처럼 모든 것이 이상할 뿐이다. 새 집의 베란다에서 밖을 바라보는 홍의 뒷모습엔 근심이 가득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폐품을 줍는 ‘리안’은 가난하지만 꿈을 꾸는 할머니다. 여기저기서 모은 소중한 물건들을 시바티 언덕에 모아 ‘꿈의 공간’을 만들었다. 반쪼가리 말 동상도, 커다란 버섯 모양 장식 도 그녀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보물이다. 재개발은 그녀의 꿈을 앗아갔다. 꿈의 집은 부셔졌고, 아들의 집은 그녀의 보물들을 전시하기엔 너무도 좁다. 리안은 조각난 꿈들을 모아서 변두리에 ‘꿈의 집’을 다시 만들고 싶지만 쉽지 않다. 쓰러진 버섯 장식을 세우는 리안의 굽은 허리에 근심이 가득했다.
철거된 시바티의 잔해를 비추며 기록은 끝이 난다. 사람들이 살던 시바티는 이제 없다. 리의 이발소도, 홍이 가판대를 등에 지고 총총 뛰던 골목도, 리안의 상상의 집도 사라졌다. 시바티에서 뿌리내리고 살던 모든 사람들은 이제 낯선 곳으로 던져졌다.
이 모든 기록은 나에게 시바티를 기억하라고 나직이 말한다. 부서진 건물들과 떠나간 사람들이 돌아올 수는 없지만 여기 살았던 사람들을 기억하라고, ‘리’의 가위질과 ‘홍’의 미소와 ‘리안’의 백련 무더기를 기억하라고 말을 걸어온다. 이내 영상은 단순한 그림과 소리의 집합체가 아니라,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기억의 한 자리에 내려앉는다.
이 글을 쓰며 ‘옥바라지’ 사진집을 다시 꺼내 들었다. “새로운 것을 위해 이전의 것이 어떻게 바뀌고 사라져 가는지”에 대한 박김형준 작가님의 관심의 기록이다. 이 사진들은 나에게 옥바라지 골목을 기억하라고 나직이 말한다. 독립문 앞, 이제는 아파트가 다 지어져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여기 살았던 사람들을 기억하라고, 이길자 사장님의 울음과 우리의 기도와 노래들을 기억하라고 말을 걸어온다.
오늘 옥바라지선교센터의 시작을 떠올려본다. 왜 우리가 버려진 돌이 되기로 했는지, 어떻게 우리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는지, 왜 우리가 ‘옥바라지선교센터’인지 기억을 더듬어본다. 억울하고, 분노했고, 웃었고, 울었던 기억들을 지금 여기 펼쳐본다. 그 기억들을 담아 떡과 잔을 나누자. 그 기억들을 담아 허공에 외치자. ‘하나님의 정의는 법 너머에 있다’는 우리의 외침을 멈추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