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선언>
지난 4월 21일 새벽 3시, 용역 깡패 70여명에 의해 을지OB베어의 사람과 집기가 모두 들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그날을 기억한다. 42년 전, 골목을 쓸고 닦으며 첫 맥주를 따른 을지OB베어의 간판이 처음으로 떼진 날이며, 상생의 가치로 골목 문화를 일군 첫 가게와 그 가게가 상징하는 모든 문화가 철거당한 첫 날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매일 같이 이 골목에 모여 잃어버려선 안 될 가게와 골목 문화를 지키기 위해 건물주 만선호프와의 ‘상생’을 외쳤다. 가난한 골목의 사정들과 엮이기 위해 내놓았던 저렴한 안주 노가리와 고추장, 그 살뜰한 마음을 닮은 단골들과 뮤지션, 작가, DJ, 종교인 그리고 미처 다 세지 못한 이들의 연대로 이 가게와 골목이 가진 공공의 가치를 모든 시민들에게 소개하며 골목 독점과 젠트리피케이션의 폐해를 널리 알릴 수 있었다.
앞에서는 대화를 이야기하며 뒤로는 비겁하고 폭력적인 야간 강제집행을 준비한 만선호프, 이미 을지OB베어 이전부터 작은 가게들을 내쫓고 11개의 만선호프 간판을 달며 골목을 독점하겠노라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던 그 폭력의 진상이 결국 골목을 망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곳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한 서울시는 골목의 가치가 공공의 가치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가치를 자본으로 잠식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중구청은 골목 활성화 명목으로 옥외영업을 허가했으나 20여개의 을지로 노가리 골목 입점 가게 중 11개에 이르는 만선호프는 허가된 것 이상의 불법 야장영업을 자행하며 골목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중구청은 한 가게의 독점이 기정사실화 되는 지난 몇 년간 어떤 선제적 조치도 취하지 않고 수수방관 하였으며 그 결과는 골목의 원조가게인 을지OB베어가 입점한 건물이 만선호프에 인수되고 용역 깡패를 동원한 강제집행과 골목 문화의 파괴로 이어졌다.
우리는 더 이상 만선호프와의 상생을 외치지 않겠다. 독점의 폐해로 얼룩진 골목 속, 을지OB베어가 추구하고 만들어온 골목 문화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훼손되었으며 수많은 대화 요구와 몇 번의 면담에서도 대화를 향한 노력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골목을 되살리기 위해 상생하고, 폭력적인 야간 강제집행에 대한 사과하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을지OB베어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와 더불어 청계천-을지로 일대에 행해지고 있는 대책 없는 재개발은 을지OB베어와 더불어 이 골목을 만들어온 상인들을 쫓아내고 있으며 노가리 골목 뿐 아니라 지켜야 할 수많은 도시 유무형의 가치들, 수 십 년간 상인들과 손님들이 함께 만든 문화가 지금도 철거되고 사라지고 있다. 지난 반 년 간 우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사라지는 수 없이 많은 동료 상인들의 가게들 사이에서 서울시와 중구청, 행정의 책임을 요구하며 을지OB베어를 지키지 못하면 서울의 어떤 가게도 지킬 수 없노라 목이 쉬어라 외쳤다. 그러나 하나하나 중구의 문화적 자산이자, 이 도시의 역사였던 오랜 가게들은 지금도 철거당하며 사라지고 있다. 그 숫자만큼의 골목 문화 또한 여전히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우리는 독점과 폭력으로 얼룩진 골목의 문을 닫는다. 차마 어찌할 수 없었던 지난 시간의 아쉬움과 설움을 이곳에 두고 간다. 그리고 우리는 상생의 기억과 감사함만을 고이 담아 가련다. 42년 전, 우리를 환대했던 인쇄골목의 상인들과 울고 웃으며 세월을 보낸 오랜 단골들, 그이들의 손을 잡고 가게를 찾던 자녀들과 장성해서 찾아 왔노라며 너스레 떠는 아이들, 함께 맥주와 노가리를 팔며 이곳을 ‘을지로 노가리 골목’이라 불릴 수 있도록 선의의 경쟁을 했던 이웃가게의 얼굴 하나하나 담아간다. 뜨거운 연탄불과 노릇노릇 구워지던 노가리, 오래된 맥주기계와 손 때 묻은 테이블, 그 모든 추억을 오늘의 것으로 만들어준 젊은이들과 이 모든 순간을 지키기 위해 싸운 연대인들을 담아간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골목에서 을지OB베어의 43주년을 준비한다. 바리바리 싸온 모든 상생의 가치들 하나하나 풀어내며 연탄불 냄새 모락 피어나던 상생의 골목을 다시 여러분에게 선물할 멋진 순간들을 기대하며.
지난 반년, 중구청 앞과 골목에서의 투쟁으로 우리는 중구청과의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었으며 중구청에 다시는 을지OB베어와 같은 아픔이 재현되지 않도록 공적 이주의 선례를 요구하고 있다. 중구청과 서울시에 요구한다. ‘서울미래유산’이나 ‘백년가게’와 같은 겉만 번지르르한 일회성 정책이 아닌 젠트리피케이션 방지책과 지속가능한 골목 문화 형성을 위한 선례를 위해 지금이라도 을지OB베어 사태 해결을 위한 노력에 나서길 촉구한다.
을지OB베어와 연대인들은 이제 중구청과 서울시, 국회와 사라져 가고 있는 청계천-을지로 일대 골목 곳곳을 찾아갈 것이다. 을지OB베어는 쫓겨나고 사라진 모든 이름의 무게를 지고 이 골목을 찾아와 상생을 외쳤던 모든 순간의 빚을 안고 행정의 책임과 을지OB베어를 비롯, 사라진 골목 가게들의 공적인 이주를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골목에서 상생의 가치를 기치 삼아 지난 42년 그래왔던 것처럼 맛있는 맥주와 저렴한 노가리를 대접하고 이 도시 한편에서 묵묵히 연탄불을 지필 것이다. 마침내 진정한 의미의 백년가게로 이 땅에 뿌리박는 그날, 그 모든 시간 주머니 가벼운 친구였고, 당당한 이 도시의 일원이었노라 자랑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골목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미 이 골목에서 각계각층의 연대로 이루어진 연대의 문화를 일궈냈으며, 을지로 노가리 골목이 독점으로 쇠락하는 동안 새로운 상생의 골목을 일구기 위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 모든 순간순간은 이미 새로운 골목으로의 선언이었으며, 을지OB베어가 지키고자 했던 가치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우리는 지난 반년간의 골목 선언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모인 모든 시민들에게 다시 한 번 연대를 요청한다. 새로운 골목에서 오랜 간판을 다시 올려 이 모든 다짐과 약속이 결국 행정도 아니고, 자본도 아닌 낡은 골목과 작은 가게를 사랑한 모든 시민의 손으로 이루어졌노라 얘기할 수 있도록 끝까지 함께 싸워달라. 우리는 을지OB베어와 모든 잃어버린 가게의 이름으로 반드시 상생의 가치를 쟁취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