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골목”
거기에는 큰길이 생길 것이니, 그것을 '거룩한 길'이라고 부를 것이다. … 악한 사람은 그 길로 다닐 수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그 길에서 서성거리지도 못할 것이다. - 이사야 35:8
그곳에 어떤 골목이 있었다. 재판장에서 한 평 짜리 주방, 그 노동의 공간이 필요했을 뿐이라고 외친 족발집 사장이 손님을 맞던 서촌의 골목이 있었다.
그곳에 어떤 골목이 있었다. 43년 전, 이른 아침부터 골목을 쓸며 이웃과 인사하던 한 가게를 시작으로 작은 가게들이 자리하며 ‘을지로 노가리 골목’이라 불리게 된 골목이 있었다.
그곳에 어떤 골목이 있었다. 24시간 불을 끄지 않고 수많은 시민들의 식탁에 오를 생선을 손질하던 상인들이 만든, 새벽을 열고 늦은 밤, 불을 밝히던 구 노량진수산시장이 있었다.
이제 그 골목들은 없다. 12차례의 강제집행 끝에 쫓겨나야 했던 서촌의 궁중족발이 있던 자리는 여전히 깨진 창문과 굳게 닫힌 문으로 공실이며, 5차례의 강제집행 끝에 쫓겨나야 했던 을지OB베어가 있던 골목은 독점과 개발 끝에 만선호프만 남아 황폐하다. 오랜 시간 공터였던 구 노량진수산시장 자리에는 축구장이 들어섰고, 개발 야욕으로 급하게 세워진 새로운 시장은 여전히 상인들을 다 품지 못한 채 초라하다.
이제 우리는 새 골목을 선언한다. 그 골목에는 강제집행이 없다. 젠트리피케이션도, 월세를 네 배나 올리는 건물주도 없으며, 쫓겨남이 없다. 그 골목을 우리는 ‘거룩한 골목’이라 부를 것이다. 건물주와 용역 깡패들, 시행사는 그 골목을 다닐 수 없고, 이 모든 악한 체제에 복무하며 이득을 보려하는 이들은 그 골목에서 서성거리지도 못할 것이다.
개발과 폭력을 피해, 혐오와 낙인을 피해 숨어 다녀야 했던 철거민과 쫓겨나는 상가세입자들은 그 골목에 터를 잡고 당당히 삶을 영위할 것이다. 장사할 것이고, 살아갈 것이다. 연대하는 이들은 그 골목의 단골이 되어 웃고 떠들며 이곳에 거룩한 골목이 있노라고 노래하며 춤출 것이다. 그 일을 두고 누구도 송사하지 않고, 누구도 손가락질 않을 것이다. 그 골목에 모인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기 때문이다.
궁중족발의 새 골목에서 쫓겨남이 없기를, 을지OB베어의 새 골목에서 쫓겨남이 없기를, 노량진수산시장의 새 골목이 어서 오기를!
2023년 3월 29일 옥바라지선교센터 제6회 총회 참가자 일동
